지난달 HyperCLOVA X 서비스를 정리하고 AMD GPU 인프라에 올인하던 네이버가, 이번 주 바르셀로나에서는 전혀 다른 주제를 들고 나왔다. 4월 13일부터 17일까지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ACM CHI 2026. HCI(Human-Computer Interaction) 분야 최정상 학회인 이 컨퍼런스에 네이버 AI Lab이 자폐 스펙트럼 청소년을 위한 AI 저널링 시스템 논문을 발표한다. GPU 투자와 모델 경쟁이 주된 화두인 한국 AI 업계에서, 이건 꽤 의외의 행보다.
Autiverse — AI가 십대의 하루를 묻는 방법
논문 이름은 "Autiverse: Eliciting Autistic Adolescents' Daily Narratives through AI-guided Multimodal Journaling." 네이버 AI Lab의 양미경·김영호 연구원, 성균관대 한진영 교수, 네이버 클라우드의 박소현 연구원이 공저했다.
핵심 아이디어는 직관적이다. 자폐 스펙트럼 청소년이 자기 하루를 기록할 수 있도록 AI가 대화형으로 안내하는 멀티모달 저널링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텍스트만 받는 게 아니라 사진, 음성 등 여러 입력 채널을 열어두고, 생성형 AI가 맥락에 맞는 후속 질문을 던져서 이용자의 서사를 끌어낸다.
"저널링"이라는 단어가 가벼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폐 청소년에게 자기 서사(self-narrative)를 구성하는 건 인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굉장히 무거운 작업이다. 대화의 맥락을 계속 따라가기, 감정을 적절한 단어로 변환하기, 경험을 시간 순서대로 조직하기. 신경전형(neurotypical) 성인에게는 자동화된 이 과정들이, 자폐 스펙트럼에 있는 십대에게는 하나하나가 장벽이 된다.
기존 저널링 앱 대부분은 이 장벽을 고려하지 않는다. 빈 입력 칸을 주고 "오늘 하루 어땠나요?"라고 묻는 게 전부다. Autiverse의 접근은 다르다. 사용자가 사진을 올리면 AI가 그 이미지를 기반으로 구체적인 질문을 생성하고, 음성 입력이 중단되면 같은 의도를 다른 형태로 재구성해서 다시 시도한다. LLM의 대화 능력을 "더 나은 범용 챗봇"이 아니라 "표현에 어려움을 겪는 특정 사용자군의 서사 보조 도구"로 재정의한 셈이다.
기술 스택보다 문제 정의가 인상적인 연구다. 김영호 연구원이 이끄는 네이버 AI Lab HCI 그룹은 Personal Informatics(PI)를 중심 테마로 잡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행동에 긍정적 변화를 만들도록 돕는 시스템을 연구한다. 최근에는 그 대상을 소외 집단(marginalized populations)까지 확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파라미터 자랑이 안 먹히는 시대
한국 빅테크의 AI 연구는 한동안 "모델 크기 올리기" 경주에 빠져 있었다. HyperCLOVA, KoGPT, EXAONE — 파라미터 수를 걸고 벤치마크 순위를 다투던 시절이 있었다. 작년 하반기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네이버는 CLOVA X 소비자 서비스를 사실상 축소했고, 카카오는 자체 대규모 모델 대신 카나나와 외부 모델 통합 전략으로 선회했다.
범용 모델 성능에서 OpenAI, Anthropic, Google DeepMind와 정면 승부를 걸겠다는 건 비현실적이다. 자본 규모가 다르고, 연구 인력 풀이 다르고, 데이터 접근성이 다르다. 그걸 인정하고 나면 질문 자체가 바뀐다. "얼마나 큰 모델을 만들 수 있냐"에서 "이 모델로 구체적으로 누구의 어떤 문제를 풀 수 있냐"로.
Autiverse는 바뀐 질문에 대한 네이버의 한 가지 답이다. 범용성 경쟁에서 이길 수 없으니, 특정 사용자군의 깊은 문제를 파고드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NAVER LABS Europe이 로보틱스와 컴퓨터 비전 쪽에서 꾸준히 CHI에 참여해온 것과 별개로, 한국 본사 AI Lab이 HCI 학회에 직접 나서는 건 상징적 의미가 있다. 유럽 연구소가 아닌 한국 팀이, 한국 사용자 맥락을 품은 연구를 국제 무대에 올렸다는 것이니까.
엔지니어에게 이게 뭘 의미하나
CHI 논문 하나로 네이버 전체 전략이 전환됐다고 보긴 어렵다. 연구 조직의 한 갈래가 이런 방향을 잡았다는 거지, 회사 전체가 HCI로 피벗했다는 뜻은 아니다.
그래도 방향은 읽을 수 있다. 배민의 MCP 서버, 토스의 보안 자동화용 Qwen 셀프호스팅, 네이버의 RAG 품질 정량화 체계 — 최근 국내 기술 블로그에서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우리도 AI 쓴다"가 아니라 "이 AI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용자의 어떤 문제를 풀고 있다"가 글의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Autiverse는 그 흐름의 가장 뾰족한 꼭짓점이다. "AI 엔지니어"라는 직함의 의미가 모델 학습과 서빙 인프라에서, 특정 사용자군의 맥락을 이해하고 적절한 인터랙션을 설계하는 쪽으로 무게를 옮길 수도 있다. 그게 먼 미래의 이야기인지, 이미 시작된 변화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다만 네이버 AI Lab이 바르셀로나에서 그 방향으로 한 발을 내딛은 건 확실하다.